본문 바로가기
불경(佛經)

승만경(勝鬘經)-下

by 淸庵 2022. 2. 19.
728x90
반응형

승만경(勝鬘經)

 

 

제6. 다함없는 진리(無邊聖諦章)

 

“세존이시여, 성문과 연각이 처음으로 성스러운 진리를 관찰할 때에 하나의 지혜로써 모든 잠재적 번뇌를 끊는 것이 아니며, 하나의 지혜로써 네 가지 지혜의 모든 공덕을 끊는 것도 아니고, 또한 법으로서 능히 이러한 네 가지 법의 뜻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러한 네 가지 법의 뜻<四聖諦를 의미함. 괴로움을 아는 일, 괴로움의 원인을 끊는 일,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는 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잘 압니다.

세존이시여, 세간을 벗어나는 최고의 지혜에는 점진적으로 이르게 되는 네 가지 지혜[四智]도 없으며, 점진적으로 이르게 되는 네 가지 대상[四緣]<위에서 말한 네 가지의 법과 뜻>도 없습니다. 점진적으로 이르게 되는 법이 없는 것이 세간을 벗어나는 최고의 지혜입니다.

세존이시여, 금강석과 같다[金剛喩]고 하는 것은 곧 제일의(第一義]의 지혜입니다.

세존이시여, 성문과 연각은 무명의 잠재적 번뇌를 끊지 않았으므로 처음 관찰한 성스러운 진리의 지혜가 제일의의 지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두 가지 진리를 아는 지혜로써 여러 가지 잠재적 번뇌를 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 응공, 등정각은 모든 성문이나 연각의 경지가 아니고 부사의한 공의 지혜이니, 모든 번뇌의 더미를 끊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번뇌의 더미가 무너진다면 구경의 지혜가 곧 제일의의 지혜라고 이름 하는 것이며, 처음 관찰한 성스러운 진리의 지혜는 궁극적인 지혜가 아니며 다만 위없이 바른 깨달음의 지혜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성스러운 뜻이라는 것은 모든 성문이나 연각에 대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성문과 연각은 유한한 공덕을 성취할 뿐이며, 성문과 연각은 불완전한 공덕을 성취할 뿐이므로, 이름 해서 ‘성스럽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스러운 진리라는 것은, 성문이나 연각의 진리가 아니며, 또한 성문과 연각의 공덕도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진리는 여래, 응공, 등정각이 처음으로 비로소 깨달아 아는 것이지만, 그 뒤에도 무명의 껍질에 싸여 있는 세간을 위해서 출현하여 연설하므로 성스러운 진리라고 이름 하는 것입니다.”

 

 

제7. 여래장(如來藏章)

 

“성스러운 진리란 매우 깊은 뜻을 설하는 것이며, 미세하므로 알기 어려운 것이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 이는 지혜로운 사람의 알 바이며, 모든 세간 사람들이 능히 믿을 바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매우 깊은 여래의 씨앗[如來藏]<산스크리트어 tathagatagarbha이다. 중생들의 마음 속에 잠재되어 있는 여래의 태(胎), 본래불성을 말함>을 설하기 때문입니다.

여래장이라는 것은, 곧 여래의 경계이며 모든 성문이나 연각의 알 바는 아닙니다. 여래장의 차원에서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입니다. 여래장의 차원이 매우 깊기 때문에 성스러운 진리를 설하는 것 역시 매우 깊고 미세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닙니다.<원효스님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여래장은 심오하니 모습을 떠나 있으며 성품도 떠나 있고, 있음도 아니며 없음도 아니므로 여래장이라 이름 하는 것이다.’> 이는 지혜로운 사람의 알 바이며, 모든 세간 사람들은 능히 믿을 바가 아닌 것입니다”

 

 

제8. 법신(法身章)

 

“만약 한량없는 번뇌의 더미에 싸여 있는 여래장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면, 한량없는 번뇌의 더미에서 벗어난 법신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래장, 여래의 법신, 부사의한 부처님의 경계 및 방편을 설함에 대하여 마음으로 확신할 수 있다면, 이러한 사람은 곧 두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설함을 신해(信解)할 것입니다.

이렇게 알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른바 두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두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뜻이냐 하면, 이른바 지음이 있는[有作]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과, 지음이 없는[無作]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입니다.<有作은 有爲에, 無作은 無爲에 상응한다.>

지음이 있는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은 곧 유한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설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능히 모든 괴로움을 알 수 있으며,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끊을 수 있으며, 모든 괴로움의 소멸을 얻을 수는 있으나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함이 있는 생사와 함이 없는 생사가 있으며, 열반도 역시 이와 같아서 남음이 있는 열반[有餘涅槃]과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涅槃]이 있습니다.

지음이 없는 성스러운 진리의 뜻을 설한다는 것은 무한한 네 가지 진리의 뜻을 설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능히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괴로움을 받을 줄 알고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끊을 줄 알며, 모든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며,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닦습니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성스러운 진리<지음이 있는 성스러운 진리와 지음이 없는 성스러운 진리는 각기 네 가지가 있으므로 여덟 가지이다.>는 곧 여래가 설한 네 가지 진리입니다.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지음이 없는 성스러운 진리의 뜻은 오직 여래, 응공, 등정각의 궁극적인 일이며 아라한, 벽지불의 궁극적인 일이 아니니, 왜냐하면 하(下), 중(中), 상(上)의 법으로써 열반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여래, 응공, 등정각은 지음이 없는 네 가지 진리의 뜻에 대하여 궁극적인 경계를 얻는 것인데, 모든 여래, 응공, 등정각으로서 모든 미래의 괴로움을 알고 모든 번뇌와 부수적 번뇌가 거두어들이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알며, 모든 의생신(意生身)을 멸하며 모든 괴로움을 멸하여 깨달음을 짓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존재의 소멸을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이름 하지 않습니다.<괴로움이 소멸되는 것이 괴로움을 받았던 존재 자체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

이른바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하는 것은, 비롯함이 없고, 지음이 없으며, 일으킴이 없고, 다함이 없으며, 다함을 떠나 있으며, 상주하며, 자성이 청정하며, 모든 번뇌의 더미를 떠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으며, 떠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으며<그 대상은 지혜이다. 이 문장과 같은 뜻의 말씀이 ‘부증불감경’에 설해져 있다. “내가 설하는 법신이라는 것은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보다도 많은 여래의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덕성과 불가분의 것이며, 여래의 지혜에서 유래하는 덕성과도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다르지 않으며, 헤아릴 수 없는 불법을 성취하여 여래의 법신을 설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여래의 법신은 번뇌의 더미를 떠나지 않으므로<재전(在纏) 법신임을 밝히는 것> 여래장이라 이름 하는 것입니다.”

 

 

제9. 공의 두 가지 진실한 모습(空義隱覆眞實章)

 

“세존이시여, 여래장의 지혜는 여래의 공(空)한 지혜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모든 아라한, 벽지불, 대력(大力)보살이 본래 보지 못하는 바이며 본래 얻지 못하는 바입니다.

세존이시여, 두 가지 여래장의 공한 지혜가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공한 여래장(空如來藏)은 모든 번뇌의 더미에서 혹은 떠나 있으며, 혹은 벗어나 있으며, 혹은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은, 번뇌와 불법과의 관계를 말하기 때문이며, 여래장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 아님>

세존이시여, 공하지 않은 여래장[不空如來藏]은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부사의한 불법을 혹은 떠나지 않으며, 혹은 벗어나지도 않으며, 혹은 그것과 다르지도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두 가지 공한 지혜는 모든 위대한 성문<위대한 성문이란 소승을 돌려서 대승에 들기 때문이다.>들도 능히 여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모든 아라한, 벽지불의 공한 지혜는 네 가지 전도된 경지를 반연으로 해서 작용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아라한, 벽지불은 본래 보지 못하는 바이고 본래 얻지 못하는 바입니다.<‘대보적경’ 승만부인회에서는 이승(성문승‘아라한’ 과 연각승‘벽지불’)의 입장에서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부정(不淨)을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 관찰하는 것이 전도된 소견이라고 함.>

모든 괴로움의 소멸은 오직 부처님만이 깨달아 얻는 것이며, 모든 번뇌의 더미를 부수며 모든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을 닦는 것입니다.”

 

 

제10. 하나의 진리(一諦章)

 

“세존이시여, 이러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서 셋<고제, 집제, 도제>은 무상하고 하나<멸제>는 영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 가지 진리는 함이 있는 현실[有爲相] 속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함이 있는 현실 속에 포함된다는 것은 곧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한 것은 곧 허망한 존재입니다.

허망한 존재라는 것은 진리도 아니며, 영원한 것도 아니며 의지할 만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이라는 진리,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진리 등은 모두 제일의의 진리가 아닌 것이며, 영원한 것도 아니며, 의지할 만한 것도 아닙니다.”

 

 

제11. 하나의 의지처(一依章)

 

"오직 하나,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만이 함이 있는 현실을 떠나는 것입니다.

함이 있는 현실을 떠나는 것은 곧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허망한 존재가 아닙니다.

허망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진리이며 영원한 것이며 의지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만이 제일의(第一義)의 진리입니다."

 

 

제12. 전도된 견해와 올바른 견해(顚倒眞實章)

 

두 가지 전도된 견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입니다.

모든 중생의 심식(心識)으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을 넘어서 있는 것이며, 또한 모든 아라한, 벽지불의 지혜가 미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비유하면,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은 갖가지 형상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고, 이제 태어난 지 7일되는 아기가 태양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 역시 이와 같아서 모든 범부의 심식으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또한 이승(二乘)<성문승‘아라한’ 과 연각승‘벽지불’>의 지혜가 미칠 수 있는 경계도 아닙니다.

범부의 심식이라는 것은 극단적인 견해[二見]로 뒤바뀐 것이며, 모든 아라한, 벽지불의 지혜는 곧 청정합니다.

치우친 견해[邊見]라는 것은, 범부가 몸과 마음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五受陰]<모습(色), 받아들임(受), 표상(想), 의지(行), 의식(識)의 다섯 가지 온(蘊)>에 대하여 아견, 망상, 집착으로 두 가지 소견을 일으키는 것을 치우친 견해라 이름 하는 것이니, 이른바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입니다.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니 올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열반은 영원하다고 보는 것은 상견이니 올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모두 망상으로 인해서 이러한 견해를 짓는 것입니다.

신체와 여러 가지 감각 기관에 대하여 분별하고 사유하되 현재의 존재가 부서짐을 보면서도 윤회 생존의 계속함[有相續]을 보지 못하여 단견을 일으키는 것은 망상으로 인해서입니다.

마음의 상속에 대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찰나 사이의 의식 작용에 대하여 상견을 일으키는 것도 망상으로 인해서입니다.

이 같은 망상의 견해가 그 같은 뜻에 대하여 지나치거나 모자라서 다르다는 분별[異相分別]을 짓거나, 끊어졌다고 하거나 영원하다고 생각하여서 전도된 중생은 몸과 마음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에 대하여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괴로움인데 즐거움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아를 아(我)라고 생각하고, 부정한 것을 청정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아라한, 벽지불의 청정한 지혜라는 것은 모든 앎의 경계 및 여래의 법신에 대하여는 본래 보지 못한 바입니다.

어떤 중생이 부처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영원하다는 생각, 즐겁다는 생각, 나라는 생각, 깨끗하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니, 전도된 견해가 아니며 올바른 견해라고 이름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견해

 

“왜냐하면 여래의 법신은 곧 완전한 상주[常波羅蜜], 완전한 기쁨[樂波羅蜜], 완전한 아[我波羅蜜], 완전한 청정[淨波羅蜜]이니, 부처님의 법신에 대하여 이러한 견해를 갖는 것을 올바른 견해라고 이름 합니다.

올바르게 보는 자는 곧 부처님의 참된 아들이니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태어나며, 올바른 가르침을 좇아서 태어나며, 올바른 가르침의 교화를 좇아서 태어나며, 가르침의 재산을 상속하는 사람입니다.

세존이시여, 청정한 지혜라는 것은 모든 아라한, 벽지불의 지혜바라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청정한 지혜<아라한이나 벽지불의 청정한 지혜>는 비록 청정한 지혜라고는 하지만 저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에 있어서도 작용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네 가지 의지의 지혜[四依智]<‘열반경’의 네 가지 의지인데 다음과 같다. 가르침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依法不依人],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라[依智不依識],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依義不依語], 궁극적인 의미를 설한 말씀에 의지하고 궁극적인 의미를 설하지 않은 말씀에는 의지하지 말라[依了義經 不依不了義經]>에 작용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세 가지 길[三乘]에 속하는 초심자도 가르침과 그 뜻에 어리석지 않으며, 마땅히 깨닫고 마땅히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세존께서는 네 가지 의지할 바를 설하시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네 가지 의지할 바는 곧 세간의 법입니다.

세존이시여, 하나의 의지할 바[一依]라는 것은 모든 존재의 의지할 바이며, 세간을 벗어나는 제일의(第一義)의 의지할 바이니, 이른바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입니다.”

 

 

제13. 자성의 청정(自性淸淨章)

 

생사의 뿌리, 여래장

 

“세존이시여,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여래장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래장이기 때문에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本際]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생사를 설하는 것은 잘 설하는 것이라 이름 합니다.

세존이시여, 생사라고 하는 것은 모든 감각 기관이 사라지고 이어서 일어나지 않았던 감각 기관이 일어나는 것을 생사라고 이름 합니다.

세존이시여, 죽음과 태어남의 이 두 법은 여래장입니다.

세간의 언어로 설하기에 죽음이 있고 태어남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감각 기관이 부서지는 것이며, 태어남은 새로 감각 기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래장은 태어남이 있으며 죽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래장은 함이 있는 현실을 떠나 있습니다.

여래장은 상주하여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래장은 의지하는 바가 되며, 지니는 바가 되며, 건립하는 바가 됩니다.

세존이시여,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불법에 떠남도 없으며 끊어짐도 없고, 벗어남도 없고 다름도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끊어지고, 벗어나며, 달라지고, 외화(外化)되는 함이 있는 법이 의지하고 건립하는 것은 여래장입니다.<유위법 역시 여래장에 의지하여 존재한다는 것. 중생 역시 여래장에 의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세존이시여, 만약 여래장이 없다면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이 열반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여섯 가지 의식[六識]과 의식 작용 그 자체로서의 마음[心法]<제 7식, 말라식> -이 일곱 가지- 은 찰나적인 존재여서 머무르지 않으며, 갖가지 괴로움을 심지 못하며,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이 열반을 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아(娥)도 아니며, 중생도 아니며, 생명도 아니며, 다른 사람도 아닙니다.<‘금강경’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여래장이 어떤 실체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여래장은 몸이 있다고 보는 견해에 떨어진 중생, 전도된 중생, 공으로 말미암아 혼돈에 빠진 중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래장과 번뇌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곧 법계장(法界藏), 법신장(法身藏), 출세간상상장(出世間上上藏), 자성청정장(自性淸淨章)<이들은 모두 여래장을 주어로 갖는 술어로서, 여래장의 다른 이름이다.>입니다.

이 성품은 청정한 여래장인데 객진 번뇌(客塵煩惱)와 부수적 번뇌의 오염되는 바로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여래의 경계입니다.

왜냐하면 찰나의 착한 마음은 번뇌에 물들지 않고 찰나의 착하지 않은 마음 역시 번뇌에 물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번뇌도 마음에 접촉하지 않고 마음도 번뇌에 접촉하지 않으니, 사물[法]에 접촉하지 않는데 어떻게 마음을 물들일 수 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그러나 번뇌가 있으며 번뇌에 물드는 마음도 있습니다.

본래부터 청정한 마음[自性淸淸心]<자성은 ‘본래’, ‘태어나면서’라는 의미>이면서 물드는 것이 있음은 가히 잘 알기 어렵습니다.

오직 부처님 세존만이 진실한 눈, 진실한 지혜로써 법의 근본이 되고, 법을 통달함이 되고, 정법의 의지처가 되어서 올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승만 부인이 이와 같은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을 설하면서 부처님께 물었을 때, 부처님은 곧 수희(隨喜)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면서 물듬이 있다는 것은 가히 완전히 알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이 두 가지<객진 번뇌(客塵煩惱)와 자성청정심(自性淸淸心)>는 알기 어렵다.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라는 것을 완전히 알기 어렵고, 그렇게 청정한 마음이 번뇌에 물든다고 하는 것도 완전히 알기 어렵다.

이러한 두 가지는 그대와 위대한 가르침을 성취한 보살마하살이 이에 능히 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 다른 성문들은 오직 부처님 말씀을 믿기만 할뿐이다.”

 

 

제14. 참된 아들(眞子章)

 

“만약 나의 제자로서, 믿음에 따라서 증상(增上)하는 자는 밝은 믿음에 의지한 뒤에 진리의 지혜에 수순(隨順)하여 구경을 얻는다. 진리의 지혜에 수순한다는 것은 시설(施設)된 감각 기관과 뜻의 활동 영역을 관찰하며, 업의 과보를 관찰하며, 아라한의 번뇌[隨眠]를 관찰하며, 마음의 자재로운 즐거움과 선정으로 얻는 즐거움을 관찰하며,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의 성스럽고 자재로운 신통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선교방편의 관찰을 성취하고, 내가 입멸(入滅)한 뒤 미래세 중에서라도 나의 제자가 믿음에 따라서 증상하는 데 밝은 믿음과 진리의 지혜를 의지한다면, 자성의 청정한 마음이 번뇌의 오염을 입을지라도 구경을 얻을 것이다.

구경이라는 것은, 대승의 길에 들어가는 원인이다. 여래를 믿는 자는 이러한 큰 이익이 있으므로 깊은 뜻을 비방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다시 그 밖에도 큰 이익이 있사오니, 저는 마땅히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서 이 뜻을 설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시 설하도록 하라.”

승만 부인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 부류의 선남자, 선여인은 매우 깊고 깊은 뜻을 스스로 훼손하거나 상하게 하지 않고 큰 공덕을 낳아서 대승의 길에 들어갑니다.

어떤 것이 세 부류인가 하면, 이른바 어떤 선남자, 선여인은 스스로 깊고 깊은 진리의 지혜를 성취합니다. 어떤 선남자, 선여인은 진리의 지혜를 수순함을 성취합니다. 어떤 선남자, 선여인은 모든 깊고 깊은 법을 스스로 완전히 알지 못하고 부처님을 우러르면서 ‘이는 나의 경계가 아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바’라고 합니다.

이들을 선남자, 선여인이라 이름 하는 것은 오직 부처님만을 우러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남자, 선여인을 제외하고”<뒷말은 제15장으로 이어짐 - 구나발타라역에서는 승만경을 전체 15장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제15. 승만 부인(勝鬘場)

 

“나머지 모든 중생들 -매우 깊은 가르침에 집착하여 망령되게 말하며 올바른 가르침을 위배하고 여러 가지 외도(外道)를 익혀서 부처님의 종자를 썩게 하는 자들- 은 마땅히 왕의 힘이나 하늘, 용, 귀신의 힘으로 조복해야 합니다.”

때 승만 부인과 모든 권속들이 부처님의 발에 정수리를 대면서 예배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착하다, 착하다, 승만이여! 매우 깊은 가르침을 방편으로 수호하며 올바르지 못한 가르침을 항복하고 그 마땅한 바를 잘 얻으니, 그대는 이미 백 천억의 부처님을 모셨으므로 이러한 뜻을 능히 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는 뛰어난 광명을 놓으셔서 널리 대중을 비추시고, 몸이 허공으로 7다라수(多羅樹)만큼 올라가셔서 발로 허공을 밟고 사위국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승만 부인과 모든 권속들이 합장하여 부처님을 향하고 바라보는데 싫어하거나 만족해함이 없었으며 눈을 잠시도 쉬지 않았으며,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 기뻐하여 뛰면서 저마다 여래의 공덕이 갖추어진 것을 찬탄하였다.

부처님을 염하면서 다시 성(城)으로 돌아와서는 우칭왕(友稱王)을 향하여 대승을 찬탄하고 성(城) 중의 일곱 살 이상 여인들을 모두 대승으로 교화하였다. 우칭왕 역시 일곱 살 이상의 모든 남자들을 대승으로 교화하여서, 온 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모두 대승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기타태자의 숲으로 들어가셔서 장로 아난에게 일러주었으며<승만경의 본문 내용>, 또한 천제석(天帝釋)을 염하셨다. 그때에 제석과 모든 권속들이 홀연히 와서 부처님 앞에 머무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천제석과 장로 아난을 향하여 널리 이 경전을 설하시고 나서 제석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마땅히 이 경을 받아 지니며 읽고 외워라. 교시카여<Kausika. 인드라(Indta)의 별명. 인드라는 원래 바라문교의 신이었으나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 이를 제석천 혹은 천제석으로 부른다.>, 선남자, 선여인이 갠지스 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겁 동안 깨달음의 행을 닦으며 여섯 가지 바라밀을 행하더라도, 만약 다시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니거나 읽고 외우며 내지 잘 보호한다면 복이 저 공덕보다도 더 많을 것이다. 하물며 널리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설하는 것이랴! 그러므로 교시카여, 마땅히 이 경을 읽고 외우며 삼십삼천을 위해서 분별하고 널리 설하라.”

다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대 역시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사부 대중을 위하여 널리 설하라.”

그때 천제석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어떻게 이름 하오며, 어떻게 받들어 지니리까?”

부처님께서 제석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은 한량없으며 가이없는 공덕을 성취하리니 모든 성문, 연각은 능히 이르지 못할 것이며 관찰하여 알 수 없을 것이다. 교시카여, 마땅히 알아라. 이 경은 매우 깊고 미묘한 큰 공덕의 덩어리이니, 이제 마땅히 그대를 위해서 그 이름을 간략히 설하리라. 잘 듣고, 잘 들어서, 잘 생각해 잊지 않도록 하라.”

그때 천제석과 장로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오직 가르침을 잘 받아 지니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은 ‘여래의 진실하고도 제일의(第一義)인 공덕을 찬탄하는 것’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큰 서원’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모든 원을 거두어들이는 대원(大願)’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올바른 가르침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하나의 길에 들어가는 것’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다함없는 성스러운 진리’를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여래장’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법신’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공의 두 가지 진실한 모습’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하나의 진리’를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상주하며 안온한 하나의 의지처’를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전도된 견해와 올바른 견해’를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자성의 청정한 마음의 두 가지 측면’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여래의 진실한 아들’을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승만 부인의 사자후’를 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수지 할지어다.

다시 교시카여, 이 경에서 설하는 바는 모든 의심을 끊고 궁극적인 뜻에 안주하며 하나의 길에 들어가는 것이다.

교시카여, 이렇게 승만 부인이 사자후한 경을 그대에게 부촉하나니, 이 법에 머무르며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널리 분별하여 설하라.”

제석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높으신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그때 천제석, 장로 아난 및 여러 모임의 천(天), 인(人), 아수라, 건달바 등이 모두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를 듣고, 환희하며 힘써 행하였다.

 

 

-승만경(勝鬘經) 

 

728x90
반응형

댓글